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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일기 벽돌시리즈

문제의 다각화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삼백 구십 구 번째

 

 

 

날씨가 스펙타클하다. 가을이 한 달이나 늦어지는 이 무렵에 전날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틀어야 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쌓여온 이자 받으러 왔다며 일단 거실에 드러눕는 빚쟁이 마냥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질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가을이란 날씨가 좋긴 한데 너무 짧아서 아쉽다. 더더욱 짧아지지 않을까 또 그렇다. 여름과 겨울의 미묘한 신경전 속에 놓인 현재, 비바람이 요동치고 있다.

 

 

 

중간에 끼면 참 난감하다. 샌드위치적인, 이리치이고 저리 치일 수도 있는 중간, 중도의 위치는 항상 어렵다. 중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중립의 위치가 마냥 최선이고 정답이라 생각해서 한국사를 배울 때 유길준의 한국 중립론에 대해 공감을 했지만 어느새 머리가 익어가면서 중간이 마냥 최선도 정답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적으로는 중립이여만 하겠지만 한국이 마주친 상황은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정치 사회적으로 중립은 좌나 우에게 회색분자라고 욕을 먹기도 하는데 좌,우를 택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하지만 중간을 지향한다는 것은 항상 들어오는 정보들에 수동적이지 않고 맞서는 입장이므로 인풋을 가하는 자들에게는 아니 꼬운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양자택일의 선명성은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나의 쪽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에 머리에 그리 많은 포도당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며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피하기 때문이며 이 모호한 가운데 항상 신경 써야 할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 극단의 압박은 정말 말 그대로 샌드위치 사이에 낀 햄과 같다. 하지만 중립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순간 선과 악의 비현실적인 구도가 펼쳐지고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립은 힘이 필요하다. 토론에서 원만히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진행을 통제하는 사회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자가 힘 없이 예전 오징어게임 깐부할아버지처럼 "다들 그만해에ㅔㅔㅔ~"라고 외쳐봤자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정신들이 없다. 그 현장은 통제력을 잃게 된 것이다. 모호하고 불안해 보이는 중간이 오히려 바로서면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상황을 컨트롤한다.

 

보신주의적인 중립, 본인은 신중하다 생각하는 중립 또한 문제가 있다. 일단 내편이 아니라는 아니꼬움을 넘어 답이 존재하는 것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보류하려는 입장은 선택적 중립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자들도 결국 보신적인 셈이고 나의 학창 시절 아픈 기억을 떠올려보면 가해자와 침묵하는 자 모두 똑같이 느껴진다. 중립은 보신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을 정리해 본 현재 기준으로는 현실적인 중립이란 때에 따라 주제에 따라 결국 끝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여러 견해를 수용하며 문제를 입체적으로 다루다가 답이 명확해지면 그때 차선에 가까운 양자택일의 문제를 내릴 수 있는 입장과 함께 맹렬히 확실해지는 것이 중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양 극단 사이에 지구의 계절이 가을이 이렇게 힘없이 맥을 못 추리는 것은 불안함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매일마다 짧은 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가능성, 벽돌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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