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이백이십 삼 번째

해묵은 논쟁이 있다. 사람의 운명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는지. 예전에는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운명론적인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창조자로서 격상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시 부정하는 증거도 마련되고 있다.

확정적인 것은 아니나 유전적 요인이 생각보다, 생물학적 요인이 기대보다 크게 인간의 후천적 삶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볼 때 창조자로서 인간의 위치가 환경의 진화적 산물로써 다시 변하고 있다. 어쩌면 나중에 과학자들은 인간은 자유의지로 살아간다라는 명제에 그 또한 해묵은 미신처럼 결정론적 세계에서 그렇게 신앙처럼 믿고자 했던 사람들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다. 그리고 나중엔 분자단위로 쪼개서 인간의 정신 메커니즘을 밝혀낸다 한들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뇌의 화학작용이라고 표현해도 요점은 자기가 그런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 선천적으로 결정되니 후천적으로 결정되니 단정 하는 것은 수십억 년 동안의 생명 진화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
한문철 TV도 아니고 "2대 8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의 특성상 확실한 것을 선호하고 결론이 도출되기를 원하고 불확실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모호한 사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생물학적 요인이라 하면 무조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고만 혹은 인간은 교육과 학습으로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간다라고 단언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 어느 한쪽이 승리를 확실히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학계는 유전적 요인도 분명 있고 후천적 요인도 분명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복합적인 산물이라는 것으로 판단한다. 생각해 보면 진화론적 적자생존 논리로 본다면 어느 한쪽으로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확률싸움일 수 있다. 즉 위험분산을 안 해놓고 인간이 진화해 왔다면, 어떤 요인 때문에 지금의 인간이 있다라면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사주팔자를 보러 가며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믿거나 혹은 자유방임주의에서 뼈 빠지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것처럼 환경과 객체의 복합적 양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고 그것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프레임 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별로 좋지 못한 양육환경이라도 자기가 다른 환경에서 자기만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이 있다.
반대로 태어날 때나 혹은 초기 환경과 특성이 아주 유리하게 짜여진 사람이 있지만 향후 노력이란 변수나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여전히 과거의 아픔이 남아있고 후자는 선천적인 유리한 특성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자의 문제는 과거를 고칠 수 없으니 자기 노력으로 끊임없이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적응해가야 할 것이고 후자의 문제는 현재의 문제는 벌어졌으니 이전에 환경적 특성, 혜택을 이용하여 대처하는 것이다.
결국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람은 살아가면서 불확실한 자기의 삶을 위해서 어떤 한 면을 바라보는 것은 지금 당장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딱딱한 과학적 어감으로 말한다면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선천이든 후천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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