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삼백 오십 팔 번째
마음이 바뀌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뜻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참 많기도 하다. 하고 싶은 것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것 같은 데 해야만 하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 오해로 빚어진 인간관계나 말과 행동이 다른 언행 불일치의 배신자를 보노라면 혈압이 오를 대로 오르고 침울 해지기도 한다. 혹자는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하듯이 내가 소화하는 능력보다 벅찬 외부의 압력들이 여기저기 산적해 있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인지 초창기 가정환경과 이후 마주치는 삶의 장애물들이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안타깝게도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고 성격적인 면에서 혹은 생활패턴에서 침울해있거나 불안하거나 감정적 격동과 함께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버린 피해자로 변하기도 한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그리고 경제적 문제와 인간관계에서 배척당하는 느낌을 계속 받고 지내다 보면 악마가 되거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전에 모임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 중 한 명이 주장했던 의견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는 반출생주의자였다. 삶이 어차피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니 사람이 태어나는 것에 부정적이고 나쁜 것이며 아이들은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로 이야기를 했다. 여러 이야기를 오고 가며 강조를 계속하던 그를 컨트롤하기 벅찼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을 떠났다. 굉장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보면서 이상함과 동정 여러 복잡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우울했던 과거 그리고 아직 여파가 남아있는 현재를 보노라면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쾌활하게 살기 위해 지향한다지만 막상 혼자 있을 때 침울해하거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비관적인 시선과 세계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염세적이거나 비관적인 관점이 무작정 나쁜 것만으로 보지는 않는다. 지나친 낙관주의의 말로도 여러 번 겪어봤으니까.
하지만 염세적인 관점 혹은 허무적인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면 쉽게 말해 힘 빠지는 일상을 보내기 쉽다는 점이다. 또한 수동적인 입장으로 다가오는 장애물들을 온몸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어떻게 회피하고자 허무와 부정적인 시선을 또 다른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아서 뭐 하냐? 되는 일 하나도 없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일정 부분 할애되어 있는 본인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디서 주워들은 니체나 다른 철학자들의 염세적 의견이나 관점을 어설프게 받아들여 현재라는 시간속에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왜 태어나게 했는지라고 주장했던 반출생주의를 주야장천 주장했던 그 사람도 어쩌면 본인의 개성을 뽐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청개구리 심보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다른 사상에 대해 웬만하면 다 받아들이는 입장이지만 염세적이거나 허무주의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태어나고 싶든 태어나고 싶지 않든 태어나서 자라 지금까지 본인만의 의식이 성장해 오는 과정까지 분명 이 또한 자기는 원치 않았으며 그렇게 생각하게끔 세상이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면에는 분명 좋은 것이 존재하며 그것이 원초적인 욕구인지 아니면 보다 고등적인 개념인지는 각자가 달라도 그 또한 지금까지 누리고 살아왔다. 여러 모습중 하나를 택해 세상 모든 것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등 따습고 따뜻한 카페 안에서 반출생을 주장했던 그처럼 모순적 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발 아래에는 사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