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일요일 그리고 새벽. 그날은 모두가 쉬고 휴가를 다녀오는 지금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그러다가 전방에서 무언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소련제 탱크들이 떼를 지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인공기를 휘날리며 영끌에서 끌어들인 중국과 러시아의 무기들을 갖춘 머나먼 이웃들이 소리를 치고 달려오고 있었다. 작전명은 "폭풍". 3년간 한반도가 초토화될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탱크가 한 대도 없던 우리 국군은 밀려오는 기갑부대와 장비를 갖춘 북한군에게 밀려 연 이은 철수를 하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야만 했다. 재산,땅 그리고 사람들. 어느새 서울이 점령되고 친일 혹은 반동분자로 몰려 즉결처분을 당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잔인했던 북한군에게 살아남기 위해 잠시나마 동조하거나, 아니면 약간의 당근에 전향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전쟁 동안 곧 양쪽에서 점령과 수복을 반복하면서 어느 한 편에 동조한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지다가 국군에게 혹은 북한군에게 처형당했다.
바지사장 김일성이 저지른 전쟁에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암묵적으로 찬성하며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한반도라는 조그만한 전초기지가 확장이 되어 적화통일을 이룬다면 미국이 얼씬도 못한 것이란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는 결사항전을 한 끝에 그리고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국면이 전환된다.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밀고 북진하면서 통일이 되나 싶었더니 다시 중공군이 밀려들어왔다. 중공군은 우리가 알고있는 머릿 수만 많은 군대란 오해와 달리, 중일전쟁과 장제스의 국민군과 싸워 그 경험을 한껏 가지고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혈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휴전 협정을 하면서 오늘 날 38선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일제때 만들어놓았던 시설마저 폭파되거나 허물어지면서 더 이상 남아있는 게 없었다.남한에서 북한 동포들과 함께 수 백만명의 목숨을 잃게 한 책임엔 김일성이 있었고, 북한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선 패배 내지는 적화통일을 이루지 못한 책임에도 그의 결정과 판단에 있었다.하지만 그는 무력 통일을 외치던 박헌영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숙청시킨다.
오히려 그의 권력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져갔다. 소련처럼 스탈린 이전의 본래의 공산주의 체제대로라면 당 지도부가 이끌어 나가는 게 FM이었고그 당에는 여러 견해를 제시하는 파벌이라는게 존재해 집단지도체제의 형태를 보인다.마찬가지로 북한도 여러 파벌이 존재했다. 그러면 이들과 함께하는 집단지도체제를 꾸리는 게 정상적인 판단일테지만 남로당에서 연안파, 소련파까지 김일성은 그들을 조금씩 밀어버리면서 절대왕정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애초에 소련이 내세우는 바지사장 김일성은 북한을 완전 장악하기 전까지 오히려 그런 이미지를 원했는지 모른다.아부나 떨어대는, 만만하고 젋은 철 없는 인간을 부려먹기 쉽단 인식을 역 이용했던 것이다.나중엔 소련파가 숙청되는 자기 주인의 연결고리마저 잘라내는 행위는 은혜를 웬수로 갚는 김일성이 얼마나 비열한 자인지를 보여준다.